김광석
직업: 가수
출생: 1964년 1월 22일/사망: 1996년 1월 6일
신체조건: 키 164cm, 체중 58kg
데뷔: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앨범 ‘산하’, 1987년 동물원 1집 앨범 ‘거리에서’, 1989년 1집 앨범 ‘너에게’로 솔로 데뷔
경력: 1981년 솔개트리오 멤버, 1988년 동물원 멤버 수상: 1994년 한국노랫말 대상, ‘좋은 노랫말상’
팬카페: http://cafe.daum.net/kimsagain
사건 당시 조선일보(1996년 1월 6일자)기사를 살펴보자.
인기가수 김광석 씨 집안서 목매 숨져
최근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과 사망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인기그룹 ‘동물원’의 전 멤버 김광석 씨(32)가 집에서 목매 숨진 채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6일 오전 4시30분께 서울 마포구 서교동 98의 12 원음빌딩 4층 김 씨 집 거실 계단에서 김 씨가 전기줄로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부인 서해순 씨(31)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부인 서 씨는 “남편과 함께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신 뒤 혼자 안방에 들어 가 잠자리에 들었으나 거실에 인기척이 없어 나가 보니 남편이 옥상으로 연결되는 계단에 굵은 전기줄로 목을 매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김 씨가 지난해 11월 부인과 함께 한 달간 미국에 다녀온 뒤 미국 유학을 결심했으나 부인의 반대로 여의치 않게 되자 고민해 왔다”는 가족들의 말에 따라 이를 비관해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그러나 집안에서 유서 등이 발견되지 않아 사체를 부검, 정확한 사인을 가릴 방침이다. 80년대 인기그룹 ‘동물원’의 멤버였던 김 씨는 솔로 데뷔 이후 최근까지 라이브콘서트 1천 회를 기록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해왔으며 ‘거리에서’, ‘나의 노래’ 등 발라드락풍의 곡으로 청소년과 중장년층 음악팬들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누려왔다.
당시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김광석은 가장 활발하게 음악활동을 하던 시기인 데다 아무런 유서도 남겨놓지 않아 어떤 이유로 자살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김광석의 언론 인터뷰와 그가 남긴 글 속에서 그의 내면의 심리상태를 알아볼 수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너의 노래에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가수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5집을 기다리고 있다, 좀 더 된장국 냄새가 나는 노래를 하고 싶다”고 고백했단다. 『공연이 중반을 넘어 섰고, 다들 축하해 주고, 열심이었다고, 특종이라고 악의 없는 칭찬들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허전함은 무엇 때문인가. 나를 치열하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나. 후회도, 보람도 아닌 그저 살아있음에 움직인… 그 움직임이 불쌍하다. 무료하다. 사람들이, 울고 웃고 박수치는 그 사람이, 사람들이 무료하다. 즐겁지 않은 이유를 모른 채 나는 여전히 즐겁지 않다. 가라앉는 것인가. 무섭구나.』 (1995년 8월 즈음) <김광석의 노트 글 中 > “훗날 자신의 노래가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비상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던 그에게도 노래는 그의 비상구였던 셈이다. 자신이 갖고 있던 깊이와 크기, 넓이를 표현할 수 있는 비상구였다. 비상구로의 탈출이 유일한 삶의 즐거움이었는 지도…. 『꿈꿀 수 있는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늘 꿈을 꾸면서 살아갑니다. 그 꿈이 실현가능한 것도 있고, 전혀 황당한 것일 수도 있지만요. 꿈을 꾸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늘 희망적입니다. 이룰 수 있는 꿈이건, 이루지 못한 꿈이건 꿈을 꿀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우린 행복합니다. 꿈을 꾸는 사람의 얼굴. 저는 언제나 그 얼굴이 되고 싶습니다.』 <김광석의 ‘수첩’에서> 『웃고 싶다. 창자가 뒤틀리고 꼬여서 끊어지도록, 하도 웃어 턱뼈에 금이 가도록 웃고 싶다. 다신 입이 다물어지지 않도록 웃고 싶다. 두 눈 까뒤집고 숨이 막힐 정도로, 헉헉거리도록, 미친 놈 소릴 들으며 골목 똥개의 꼬리를 보고도 웃고만 싶다. 웃다 웃다 하도 웃어서 눈물이 나게, 옷에 소금기가 다 배도록 눈물이 나게 웃고 싶다.』 <대학시절 노트에서>
김광석의 죽음에 대해 유서가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그의 자살동기에 관해 여전히 많은 논란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간의 김광석의 인터뷰 기사들과 주변인들의 증언,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광석의 노래들을 통해서 그의 죽음을 유추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부친의 증언에 의하면 ‘여자문제로 고민 끝에 자살에 이르게 된 것’으로 되어 있고, 지인들에 의하면 김광석은 ‘생전에 가족들이 음악인으로서의 그를 전혀 이해해 주지 못함으로 인하여 가족들과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광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4년이 흘렀는데, 그가 남긴 노래는 여전히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진정성’과 노래로 대중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그만의‘울림’이 무척이나 컸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 냄새 물신 풍기는 그의 모습이 가식이 아니었음이 노래의 울림 속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영화에서 한국군으로 분한 이병헌과 김태우는 북한군으로 분한 송강호, 신하균과 함께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를 나지막이 틀어놓고 전쟁의 허망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다 송강호는 김광석의 노래에 심취한 듯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그리고 또 이렇게 얘기한다.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
영화 속의 대사와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음악이 잘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김광석의 얼굴이 영화장면과 오버랩된다. 젊은 장정들이 요즘도 입대하기 전 이 노래를 듣고 입대하는 날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과 이별하는 장면들을 연출하곤 한다. 20대 장정들에게는 <이등병의 편지> 라면, 서른 초입에는 <서른 즈음에>가 있었고, 또 사회생활에 힘들고 지친 회사원들은 <일어나>를 신나게 따라 부르고 나면 작은 미소와 함께 어려움에서 다시 한 번 일어서 보고자 하는 의지를 갖곤 했다.
김광석은 노랫 속에서 그의 삶과 동시에 우리의 삶을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힘을 주고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정작 김광석은 어떤 어려움과 고통을 죽음까지 가져가야만 했었고, 노래가사처럼 “다시 한번 해 보거”나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까?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기사내용과 아버지와 지인들의 의견, 김광석의 언론 인터뷰 글과 메모된 글 속에 비추어 그의 자살원인을 정리해 본다.
1. 개인적 문제 -외로움, 허전함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당시 즐겁고 행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해 본다. *우울증의 진단은 없지만 우울감, 허무함, 절망감 등이 내재되어 있지 않았나 예상해 본다. -부모, 형제들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부모들의 적극적인 지지, 가정의 행복이 중요 -결혼은 했으나 아내와의 관계? 여자문제? *아내와의 행복이 중요, 아내와의 갈등-미국유학에 대한 의견 차이 -자살당일 술(새벽 3시까지) 마심 *그 당시 아내와의 어떤 안건으로 대화-갈등 *자살당시 술 마시고 행동하는 경우 빈번함 >우울함이 내재된 가운데, 술 마신 다음엔 자살행동 일으킬 수 있음. |
2. 가정 문제 -부모, 형제들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가정적으로 소외?). *음악활동에 대한 지원과 지지가 중요 *결혼해서 아내와의 관계 중요(가정의 행복) >여자문제(?)가 있었다면 더 갈등이 내재돼 있었을 것이다. |
지금까지 연예인들의 자살을 분석해 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노래가사에, 영화대사에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고, 차후 죽음을 의미하는 내용을 예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노래와 영화를 통해 나타낸 것일까?
[드림큐 사이트 방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