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사랑과 육체의 저울질
copy. 네이버 영화
내 감각이 무뎌진 것일까? 은교는 생각보다 관능적이지도 탐욕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영화 카피가 그렇게 마케팅한 것이었고, 카메라 앵글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면을 연출하려한 흔적들만 보였다.
개봉 전 파격적인 노출에 대한 이슈거리는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겨졌지만 우리 나라에도 이미 '색계'에 '박쥐'가 비슷한 논란거리로 휩쓸고 지나간 터라 그 강도는 높지 않았다.
원작이 워낙 출중해서 ‘원작이 스크린으로 얼마나 잘 구현되느냐?’가 영화관람의 포인트였다. 사실 원작을 읽지 않고 영화로 '은교'를 평하기에는 필자 스스로 양심을 속이는 듯한 미안함이 들지만 일단 소설 '은교'가 베스트셀러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점을 기준점으로 영화 '은교'를 평하고자 한다.
'70대 노인과 손녀 뻘 되는 10대 고등학생의 사랑'이라는 설정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고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사랑은 도대체 언제까지, 아니 그보다는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이 '은교'가 관객들에게 되묻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흔히들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10대 미성년자와 인생을 마감해가는 노인 사이에 피어오르는 사랑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실제로 미국 연예계 같은 곳에서는 엄청난 나이차를 극복하고서 사랑을 만들어가는 스캔들 메이커(scandal maker)들의 소식이 종종 들려오곤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실로 상상하기 힘든 사건들이지만 실제 지구 어딘가에서는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서 노시인 이적요와 은교의 사랑을 어느 정도 가능하기는 한 것으로 인정해 본다.
은교가 20대 아가씨였어도 이적요는 많은 욕을 들어야 했겠지만 은교가 10대 미성년자인지라 그들의 사랑은 세상에 드러내기에는 아주 ‘불편한 진실’이었다. 이적요가 은교에 대한 사랑을 고스란히 원고에 담아 반닫이 가구에 감춰놓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불편한 진실은 영화에서 현실화되지 않았다. 단지 이적요의 문학적 상상력의 매개체가 되었으며 젊은 청년으로 감각의 시계를 되돌릴 수 있는 판타지의 통로가 되었을 뿐이다. 이적요는 은교에 대한 사랑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세상의 제도를 거스르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욕망과 현실 앞에서 깊은 내적갈등을 겪게 된다.
손녀 뻘 되는 은교를 끔직히 아끼고 사랑을 베풀어주지만 영화에서 이적요는 은교에게 한 번도 이성적인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아주 인자한 할아버지로만 은교에게 비춰진다.
물론 은교가 이적요에게 문신을 그려주는 장면에서 은교의 다리 맡에 누운 이적요는 잠깐의 백일몽 속에서 젊은 날 자신과 은교와의 사랑을 꿈꾸어 본다. 70대 노인인 이적요의 마음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욕망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적요는 숱한 문학작품을 써내려 온 시인이었다. 대중에게 명망이 높아 스스로를 절제해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한한 문학적 상상력 속에 자신을 빠뜨리는 그런 인물이었단 말이다. 대중들에게 논란거리가 되고 지적질을 당해도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의 문학적 정신세계에서 아롯이 녹여내고 붓의 힘으로 세상에 맞서야 하는 그런 사명감이 이적요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설 은교에는 70대 노인과 10대 소녀의 정사장면 또한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이 실제 그러한 것인지 아님 이적요의 상상에서 비롯된 젊은 시절 그와 은교와의 사랑을 표현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만일 실제 그러했다면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의 말처럼 소설 은교는 “더러운 스캔들” 이야기로 치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적요의 젊은날의 육체와 10대 소녀와의 관계라면 어느 정도 수긍은 가게 된다. 하지만 다시 한번 필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던 것은 은교와 젊은날의 이적요와의 정사장면이 아니라 바로 은교와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와의 정사장면이었다.
은교는 서지우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지은 것으로 착각하고 서지우의 젊은 육체에 그녀를 내어주게 되는데, 사실 필자는 이 장면에서 아주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 이적요는 은교를 그렇게도 사랑했지만 은교는 단지 할아버지로만 그를 좋아했는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그게 옳은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적요와 충분히도 정신적 교감을 나눈 그녀인데, 그리고 적어도 소설의 집필계기가 이적요와 은교 자신과의 대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그녀가 그동안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던 서지우에게 자신의 몸을 내맡긴다는 것은 이적요에게도, 필자에게도 심한 배신감을 안겨주는 행위였다.
아직 사리분별력이 부족한 10대 소녀여서 이해하고자 하기에는 이적요와 은교가 나눈 교감이 너무 커 보인다. 보통 정신적 사랑이 더 높은 차원의 사랑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실제 남녀 사이의 사랑은 육체적·정신적 사랑이 결합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랑으로 단계상승하게 된다.
남녀사이에서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이 별개의 것이었다면 이것은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일 것이다. 이 말은 10대 소녀와의 육체적 사랑을 합리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관계였다는 점을 전제해 하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적요의 은교에 대한 실망감과 서지우에 대한 분노는 타당한 것이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질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교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폐인처럼 누워 있는 이적요 옆에 앉아 고백한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둘 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것” 그게 바로 남녀 간의 사랑 안에 존재하는 애틋함이다. 그 두근거림과 애틋함을 되찾게 해준 은교에게 이적요는 무척이나 고마웠을 것이다. 고마움을 너머 은교는 이적요에게 족히 ‘간절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런 간절함이 깨질 때를 상상해 보았는가?
사랑하는 자에 대한 간절함이 깨졌을 때의 그 심리를 이적요는 너무나 잘 보여 준다. 집안에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는 술병들, 쾌쾌한 냄새가 올라올 것만 같은 담요를 둘러쓰고 시체처럼 누워 있던 이적요. 그 모습 앞에서 결국 눈물을 보이고마는 은교의 모습은 결국 이들의 사랑이 용납받기에는, 너무나 큰 아픔과 시련이 따른다는 것을 애잔하게 보여 준다.
‘두근거림’은 어느 순간 ‘안락의자에서 곤히 잠든 하이얀 소녀’의 모습으로 그렇게 누군가에게 다가왔고, 젊은날을 충동질하다 배게 맡 눈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헤어지고마는 많은 사랑 앞에서 은교에 대한 이적요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그가 대중들 앞에서 터뜨렸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온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늚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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